[한겨레]주경철교수의 문명과 바다 / 디아스포라:이란인의 사례

아시아를 누빈 “술탄 국가의 오만한 인간들”
» 홍해와 인도 사이에서 몬순(계절풍)을 이용해 빠르게 항해했던 아랍선박(맨 위). 페르시아만의 국제적인 교역 중심지 호르무즈로 가는 상인들( 위 왼쪽)과 인도에서 아편을 피우는 영국 상인(위 오른쪽).
주경철교수의 문명과 바다 /

5. 디아스포라: 이란인의 사례

디아스포라(Diaspora)는 고대 그리스 어 dia(너머)와 speiro(씨뿌리다)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며, 우리말로는 ‘이산(離散)’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리스에서는 원래 이주와 식민화를 뜻했지만, 유대인, 아프리카 흑인 노예, 팔레스타인인 등의 경우에는 외세에 의한 ‘강제 집단이주’를 나타낸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처럼 자국민의 해외 진출이라는 적극적 의미 혹은 강제이주의 정신적 상처(트라우마)와는 거리가 있는 중립적인 용어로서, 외국에 살면서도 집단적인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규정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그리고 이 말을 발전시킨 ‘교역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해외팽창의 역사를 설명한다.


세계의 여러 문명권들은 아주 제한적인 교류에 그치거나 아예 단절되어 있다가 근대 이후 서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계 각 지역이 서로 조우했다고 하지만 사실 첫 만남은 문명 간 혹은 국가 간 대규모 교류나 전면적인 대결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기껏해야 몇몇 점과 같은 아주 제한된 공간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상이한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낯선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교역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방인은 예측하기 어렵고 위험하며 신용하기 힘든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문화(異文化) 간의 접촉과 교역은 양쪽이 상호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특별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방식은 양쪽을 중개하는 특수 집단에게 교역을 맡기는 방식이었다. 곧, 외국 사회 속에 뚫고 들어간 이방인들이 그들만의 거류지를 형성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자신의 출신 지역과 현재 거주지역(host society, 곧 그들을 받아들인 사회) 사이의 교역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류지들이 여러 곳에 만들어져서 네트워크를 이루면 더욱 강력하고 효율적인 교역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소위 ‘교역 디아스포라(trading diaspora)’다. 근대 초에 있었던 세계 각 지역 간 접촉과 소통은 흔히 이런 작은 접점을 통해 이루어졌다.

디아스포라는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잘 알려진 사례로는 아시아 각지에 뿌리를 내린 중국인 화교 공동체, 에스파한 근처의 줄파를 중심지로 하여 서쪽으로는 암스테르담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중국에까지 이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상업망을 구축한 아르메니아 상인 네트워크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진입해 들어간 것 역시 교역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예를 들어 16세기에 에스파냐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다고 할 때 우리는 통상 멕시코 전체 혹은 남아메리카 전체를 지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작 수천 명 정도의 인력으로 그 넓은 영토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상은 단지 중요한 거점 지역들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다. 영국인들의 인도 지배 역시 초기에는 몇 개의 거점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몇 개의 ‘점’의 지배가 확대되어 광활한 영토 지배가 완수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근대 초의 해외 팽창을 설명하는 데에는 ‘제국의 팽창’보다는 ‘디아스포라의 확산’이 더 알맞은 개념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현상은 아시아 해상세계에서 널리 퍼져 있던 일이었다. 서아시아와 인도로부터 중국 복건(푸젠)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상업 민족들이 해외 지역에 상업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활기찬 교역 활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아시아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띠지만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현상이 이란인들의 해외 팽창이다.

이란인들은 일찍이 12~13세기부터 인도 방향으로 이주해 가서 데칸 지방에 강대한 술탄 국가들을 여럿 건설하였다. 이와 함께 상인들이 인도 각 지역 내에 자리 잡고 활발한 교역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페르시아 만을 통해 중동 지역, 동아프리카와 인도를 연결하였고, 더 나아가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도 팽창해 갔다. 질라니(Khwaja Mahmud Gawan Gilani)라는 상인에 대한 연구 사례를 보면 그의 가족과 사촌형제들이 이집트, 메카, 인도 여러 지역에 주재원으로 자리 잡은 다음 그들 간에 말과 무기 거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문명권 사이 접촉과 교역은 외국 사회 속을 뚫고 들어간 이방인들의 거류지를 접점으로 이루어졌다. 근대 초 해외팽창은 이러한 접점, 즉 ‘교역 디아스포라’의 확산이라 할 수있다. 12~13세기 이란인들은 페르시아만에서 중동·동아프리카·인도·동남아까지 디아스포라를 확장했다. 상품 교역과 더불어 페르시아 문화·제도가 아시아에 전파됐다.

이란계 상인들은 아시아 각지로 퍼져갔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들어와서 교역 관계를 트려고 시도할 때 자주 부딪힌 인물들이 이란 상인들이었다. 유럽인들의 기록에는 “술탄 국가의 궁정을 꽉 잡고 있는 페르시아인”, “다른 어느 인도 사람들보다도 오만한 인간들”이라는 식으로 이란인들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이란 상인들은 인도의 유명한 다이아몬드 산지인 골콘다(Golconda)에서 궁정 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다이아몬드 사업을 독점하였고, 미얀마와 아유타야(태국)에 거류지를 형성하고는 이란과 이 지역 사이의 교역을 확대시켰다. 타이에서는 이들이 주석 생산과 수출을 담당했는데, 이들의 영향력이 어찌나 큰지 불교 국가인 이 나라의 국왕이 이슬람 사원을 지어주면서까지 이란 상인들을 유치하려고 했다.

이란인들의 팽창은 단지 교역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이란계 행정가·군인·학자·문인들이 인도와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퍼져가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 북부를 장악한 무굴 제국에서는 페르시아어가 궁정과 지배층의 문화 언어가 되었고 페르시아 미술과 문학이 고급문화로서 자리 잡았다.

» 주경철교수의 문명과 바다
따라서 15~18세기 동안 대규모로 지속되었던 이란인들의 이주는 아시아의 역사에서 실로 중요한 의미를 띠는 현상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시기가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형성기이자 동시에 해외 교역이 크게 팽창했던 시기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역사가들은 흔히 국가 건설은 무력에 의해 이루어졌고 내륙 지향적이며, 상업 활동과는 무관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이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예컨대 무굴제국도 상업에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자국 상인들이 해외로 많이 진출해 갔을 뿐 아니라 제국 정부도 재원 마련을 위해 국제 교역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전에는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국가’와 ‘상업’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곧, 디아스포라는 정치와는 거리를 둔 영역으로서 경제 행위만 이루어지는 부문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란인들의 사례를 보면 상업과 정치, 군사, 문화 등의 여러 부문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디아스포라는 아시아 각 지역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변화가 촉발되는 중요한 창구였다.

후일 유럽인들이 아시아의 기존 교역망에 끼어 들어가서 거점을 확보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점차 정치·군사·문화적 지배력을 확대해 간 것은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by 강아 | 2009/04/09 21:48 | 트랙백 | 덧글(0)

[한겨레]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2. 아시아의 해양세계

인도양 ‘자유 뱃길’ 따라 아시아의 부 ‘넘실’

» 1585년 유럽에서 출판된 멘도사의 <중국사>에 나오는 지도.
19~20세기 이전에 세계의 ‘무게중심’은 분명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있었다. 부와 인구 면에서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중국과 인도가 버티고 있는 아시아가 유럽을 압도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지난날의 인구나 생산규모(GDP)에 대한 통계 연구를 온전히 믿을 수야 없지만 세계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이를 이용한다면 쓸모가 전혀 없지는 않을 터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중국과 인도의 지디피(GDP) 총생산을 합치면 전 세계 총생산 가운데 거의 50%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 이후 경제 중심지가 유럽과 미국으로 옮겨가서 2001년 시점에서 세계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각 대륙의 비율을 보면 중국 12%, 인도 5%여서 두 지역의 합(17%)이 서유럽(20%) 혹은 미국 한 나라의 비중(22%)에도 못 미친다.

19세기 이전 중국과 인도는 전세계 총생산의 50%를 차지했다. 아프리카 동쪽에서 일본에 이르는 뱃길은 아랍·인도·동남아·중국 등 아시아 각지 사람들이 자유롭게 교역하는 ‘만국보편의 세계’로 아시아 부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15세기경 인도양 전체를 집어삼킬 위세로 해상진출에 나섰던 중국이 갑작스레 내륙으로 후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 유럽 선박에 비해 커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던 중국의 정크선.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현대에 들어와서 서구가 세계의 경제를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러한 서구의 경제적 지배가 생각보다 뒷시기의 일로서 19세기 이전에는 아시아가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중세 이래 유럽의 모험가, 상인들이 ‘부가 넘쳐나는’ 인도나 중국을 찾아나선 것은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은 일이었다.

인도양은 오랫동안 유라시아 대륙 해상 교역의 중심 무대였다. 인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 아프리카가 모두 인도양을 통해 서로 소통하였고, 여기에 더해서 중동 지역의 낙타대상(caravan)을 통해 유럽도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근대 이후 누가 인도양을 차지하느냐가 세계사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핵심 사항이었다. 결국 유럽인들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와서 동남아시아 각 지역을 장악하고 인도를 식민지화한 다음 이를 기반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세계사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어떠했을까?

사실 바다를 특정 세력이 ‘지배’한다는 것부터가 공격적인 해외 팽창을 시도하던 근대 유럽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일반적인 인식은 육지와는 달리 바다는 통치의 대상이기보다는 누구나 왕래할 수 있는 공로(公路)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동해안으로부터 일본에 이르는 광활한 아시아의 바다는 바로 그런 인식 그대로 누구나 왕래하며 교역을 수행하는 장소였다. 해적과 같은 방해 요소가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아시아의 바다는 자유로운 상업의 무대였다. 상업 활동 중심지인 항구 도시들은 대부분 이방인 상인들의 진입과 활동을 막지 않았다. 후일 유럽 상인들이 비교적 쉽게 아시아의 현지 교역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원래 이 지역에서 이방인 상인들을 환영하는 특성 때문이었다. 인도양의 다우(dhow), 동남아시아의 종(jong), 중국의 정크(junk) 선 등이 이 바다를 누비고 다니면서 직물, 후추, 도자기와 같은 대중 소비품으로부터 진주, 향, 바다제비집 같은 고급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들을 거래했다. 한 역사가는 이러한 인도양 세계를 두고 ‘만국보편의(ecumenical)’ 세계라고 칭했다.


15세기까지 아시아의 해상 교역의 특징은 서쪽의 홍해부터 동쪽의 일본에까지 교역망이 연이어져서 동서간으로 대단히 긴 활 모양의 해상루트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주요 간선도로 가운데에서도 최장 루트는 아덴(Aden)에서부터 남중국의 광동까지 연결된 항로였다. 이 뱃길을 타고 아랍 상인들이 중국에 대거 들어와서 중국의 츠통(刺桐) 같은 곳에는 수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특별지역이 형성되기도 했고, 반대 방향으로 중국 상인들이 ‘서양(西洋, 원래 의미는 중국에서 볼 때 말라카 너머 서쪽으로 가는 해로, 혹은 그 너머의 지역을 가리켰다)’으로 진출해 나갔다. 그 외에도 페르시아 상인, 혹은 인도의 클링(Kling), 체티(Chetti) 같은 여러 상인 집단들이 활발하게 무역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광범위한 영역 내의 요소요소에는 아덴, 캄베이, 캘리컷, 말라카 같은 중요한 연결점들이 발전했다. 상업 활동의 안전성, 은행시설, 시장 정보, 치안 등에서 아주 양호한 환경을 갖추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런 항구들이 적절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어서 광대한 지역 전체가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말라카였다. 작은 어촌으로 시작된 이 도시는 곧 상업 활동을 유치하여 이익을 취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를 위해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고, 그 결과 중국이나 시암과 같은 강대국 세력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말라카는 아시아의 거의 모든 상업 세력들이 찾는 국제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후일 말라카를 방문하고 이곳에 관한 여행기를 쓴 포르투갈인 토메 피레스에 의하면 이 도시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은 “카이로, 메카, 아덴, 아비시니아, 킬와, 말린디, 오르무즈, 터키, 아르메니아, 구자라트, 말라바르, 실론, 벵골, 시암, 파타니, 캄보디아, 참파, 코친차이나, 중국, 티모르, 마두라, 자바, 순다, 몰디브...” 등등 아시아 전 지역 출신 사람들이었다. 아시아 해양 세계는 우리가 통상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이런 식으로 발전해 오던 인도양 세계에 15세기부터 큰 변화가 계속 일어났다. 이전의 초장거리 항해 루트가 권역별로 나뉘어져서, 아라비아해, 벵골만, 남중국해 등이 어느 정도 독립적인 세계가 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변화와 동시에 중국의 해외 활동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잘 알려진 바대로 명나라의 환관 정화(鄭和)는 사상 최대의 선단을 지휘하여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순항하여 인도양 세계 전체에 위세를 떨쳤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을 등에 업은 세력이 지역 패권을 잡는 변화가 일어났고,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중국 황제의 권위를 사방에 떨친다는 목표는 확실하게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 갔다면 아시아 해상 세계는 확실하게 중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그런데 중국이 힘을 앞세워 인도양 세계에 불쑥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그렇게 강대한 해상력을 보유했던 중국이 느닷없이 해상 진출을 포기하고 자신의 내륙 지방으로 후퇴하고는 문을 닫아걸었다는 점이다. 마치 불꽃이 맹렬하게 피어났다가 급작스럽게 스러지듯이 중국은 15세기 초에 전력을 다해 아시아 해양세계를 누비고 다니다가 불현듯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 미스터리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볼 일이지만, 우선 지적할 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무대를 외부 세력에 내어줌으로써 중국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시아는 장기적으로 서구에 밀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해상후퇴’와 곧바로 이어진 유럽의 ‘해상팽창’은 세계사의 큰 흐름을 갈라놓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by 강아 | 2009/04/09 21:32 | 보고 기록하기 | 트랙백 | 덧글(0)

[한겨레]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1. 바다와 역사

» 인간의 항해, 네트워크 시대를 열다
따로 떨어져 살아가던 각 대륙 문명은 15세기 들어 바닷길로 연결된다. 전염병과 새로운 동식물·침략과 약탈 같은 ‘야먄’까지도 오갔다. 이렇게 형성된 근대세계는 제국주의로 귀결되었지만 처음부터 초역사적으로 결정돼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자, 바닷길을 떠나보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 세계는 사실 바다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세기 이전의 세계를 생각해 보자.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 뉴질랜드 등은 아시아나 유럽과는 소통이 끊어진 채 거의 별개의 세계로서 존재하였고, 아프리카는 일부 해안 지역에 외지인이 도착한 외에 내륙 지역은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으며, 유럽인들에게 아시아는 실제적인 정보보다는 환상과 유언비어에 의해 막연하게 채색된 아득히 먼 곳이었다.

이렇게 서로 떨어져서 살아가던 각 대륙 문명이 드디어 15세기부터 바닷길을 통해 서로 연결된 것은 세계사의 흐름에서 결정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때부터 세계 각 지역 사람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발전해 온 각 지역의 개별 역사는 하나의 세계사의 흐름 속에 녹아들어갔다. 사람들은 이전과는 현저히 다른 세계 속으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한번 그렇게 되자 더는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외길을 따라 앞으로만 나가게 되었다.

혹시 이런 반문을 제기할지 모른다. 세계의 흐름이 어떻든 간에 아마존 지역 내에 깊숙이 틀어박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삶의 방식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실상을 보면 오히려 이런 외지야말로 전지구적인 상호 영향이 생각보다 얼마나 더 큰지 잘 말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은 아마존 지역의 화전 경작을 두고 근대 이전의 원시적 생활 방식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화전은 오히려 유럽인들과 만나고 난 다음에 발전해 나온 ‘근대적인’ 농경 방식이다. 화전 경작을 하기 위해서는 숲에 불을 질러서 나무들을 재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숲에 불을 지른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나무에 불을 붙이려면 우선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적어도 한 철 동안 방치해서 바짝 마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돌도끼로 나무를 쓰러뜨리고자 하면 실로 엄청난 노력이 소요된다.


» 대항해 시대의 대표적인 범선. 본문 바탕 그림은 서배스천 캐벗의 세계지도(1544년)로 아마존 지역과 캘리포니아만이 자세히 소개된 최초의 지도로 알려져 있다.
가장 좋은 연구방법은 실제 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아마존 지역 주민들에게 전통적인 돌도끼를 주고 지름 1.2미터의 나무를 넘어뜨리는 실험을 해 본 결과 115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는 매일 8시간씩 3주의 노동에 해당하는 작업량이다! 그러므로 돌도끼로 1800평의 화전을 일구려면 하루 8시간씩 153일 동안 일해야 한다. 반면 쇠도끼를 사용하면 나무 한 그루를 쓰러뜨리는 데 3시간이면 되고, 1800평 화전을 일구는 데 8일이면 충분하다. 새로운 도구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는가. 유럽인들이 들여온 철제 도구를 접한 인디언들이 그것을 그토록 탐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금을 찾은 만큼 아마존 주민들은 쇠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존 주민들은 17세기에 유럽산 철제 도끼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화경을 하게 되었고 또 정착 생활을 했다. 그 이전에는 농경보다는 사냥과 채집을 위해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화전 경작이 오래된 생활양식이라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며, 이는 오히려 ‘현대의 침입’의 결과물이었다.

이 예에서 보듯이 15세기 이후 세계는 홀로 고립되어서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세계 각 지역은 나머지 모든 지역과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네트워크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만들어진 구조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세계가 되었다.

이러한 ‘네트워크’와 ‘구조’는 누가 주도하여 만들어낸 것일까?

이 점과 관련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유럽중심주의’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학계에서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이제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래도 여전히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욱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상반된 논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해양 팽창을 주도한 것이 유럽인들이었고, 그 결과 근대는 전체적으로 유럽인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19~20세기에 제국주의 시대가 되어 세계의 나머지 광대한 지역이 서구(즉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콜럼버스와 마젤란 같은 인물들의 해외 탐험은 유럽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시작한 첫 출발점이 된다.

둘째, 유럽의 지배는 처음부터 결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설명이다. 유럽인들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문명권들이 모두 나름대로 팽창을 시도했으며, 사실 18세기 이전에는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을 ‘지배’할 힘이 전혀 없었다. 처음 아시아에 들어온 유럽인들은 현지 세력을 지배하기는커녕 어떻게든 기존 상업 네트워크에 끼어들어 가서 생존을 확보하기에 급급했다. 19세기 초까지도 중국 일부 지역의 경제는 산업혁명이 한참 진행되던 영국과 유사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최근의 학계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주장이다.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이보다 더 과격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장구한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에서 서구가 지배력을 행사한 것은 19~20세기라는 비교적 단기간의 현상에 불과하며 21세기는 다시 중국과 인도가 세계의 무게중심을 차지하는 ‘정상성’을 되찾아가는 시대라고 말한다.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은 것일까? 진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근대 세계사의 흐름은 결국은 제국주의라는 무자비한 지배와 약탈의 구조로 귀결되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초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하여튼 세계의 여러 문명 간 만남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던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봄으로써 답을 구할 일이다.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보기 위해 이제 먼 바닷길을 떠나도록 하자.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by 강아 | 2009/04/06 17:52 | 트랙백 | 덧글(2)

[경향]기아인구 10억명 넘었다…개도국 정치불안 이어질듯

ㆍ미국도 10명중 1명 무료급식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식량 가격 급등이 겹치면서 지구상의 기아 인구가 최초로 10억명을 돌파했다. 세계 인구 65억명 가운데 15.4%가 굶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기아 사태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자크 디우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사무총장은 27일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에 실린 인터뷰에서 올해 들어 전 세계 기아 인구가 10억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디우프 사무총장은 지난해 식량위기로 30여개국에서 소요가 발생한 점을 지적하며 “세계 식량안보 문제는 평화와 국가안보의 문제”라고 말했다.

FAO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이후 2007년 식량위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세계 기아 인구는 8억5000만명 미만으로 유지됐다. 범세계적으로 전개된 ‘빈곤과의 전쟁’과 중국 등의 가파른 경제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개도국의 기아 인구 비율은 90~92년 20% 였으나 2003~2005년에는 16% 아래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최근 식량 값 상승과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다시 높아져 약 18%에 이르고 있다.

디우프 사무총장은 영양부족 문제는 이제 가난한 나라들을 넘어 선진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미국에서 푸드 스탬프(연방정부가 제공하는 무료급식권)를 지급받는 사람은 사상 최대인 3180만명(2008년 12월 기준)까지 늘어났다. 미국인 10명 중 1명이 정부 지원으로 끼니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푸드 스탬프에 의존하는 미국인 수는 2000년 이후 1500만명이나 늘어난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매년 증가 규모가 네덜란드 인구(1664만여명)에 버금간다”고 전했다.

디우프는 세계 영양실조 인구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이기로 한 유엔의 ‘새천년 개발목표(MDGs)’를 “2025년까지 기아를 뿌리뽑자”는 목표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 같은 목표를 이뤄내려면, 농업투자를 급격히 줄여 식량 값 폭등의 원인을 제공한 90년대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우프는 오는 11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리는 식량안보 정상회의에서 식량 불안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강구하자고 촉구했다.

by 강아 | 2009/03/28 06:59 | 트랙백 | 덧글(0)

애국가 작곡

처음 애국가는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2])〉의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http://www.youtube.com/watch?v=acxnmaVTlZA&feature=related
http://www.youtube.com/watch?v=lLG8aDITh8g&feature=related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1935년 11월 새 가락을 작곡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WD65WZ9-KgQ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는 미국에서 출판된 것이 퍼져 1940년경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졌지만 한반도에는 일제의 검열로 전해지지 못했다.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 을 매일 방송하였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아 사전

by 강아 | 2009/03/23 01:4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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